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이난 전쟁 (문단 편집) === 시로야마 전투 === {{{+2 城山籠城戦}}} 에노다케 돌파 이후 22일간 사쓰마군은 행방이 묘연하였으나 실제로는 능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총 225km의 거리를 거쳐 옛 사쓰마의 수도인 가고시마로 향하고 있었다. 9월 1일 가고시마에 도착한 사쓰마군은 곧 사학교 건물에 주둔하던 정부군 치중대를 습격, 물자를 탈취하여 가고시마 북쪽의 시로야마에 진을 친다. 정부군은 가고시마를 4월 27일에 이미 점령하였으나 후방으로 보고 설마 사쓰마 군이 오겠나 싶어 소수의 병력만을 두고 있다가 당한 것이었다. 사이고와 사쓰마 군의 복귀를 기뻐한 가고시마 시민은 즉시 봉기하여 경찰, 군인, 관리들을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시로야마에 주둔한 사쓰마 군에 합류했다. 용기를 얻은 사쓰마군은 현청 부근에서 농성중인 정부군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심대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잔존병력은 부상자를 포함하여 370여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정부군은 속속 가고시마에 도착, 5만~7만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대군으로 시로야마를 5중으로 포위하여 절대로 돌파할 수 없게 만든 다음 연일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사쓰마군은 참호를 파고 버티면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구명을 위해 간부회의를 거쳐 정부군에 사신을 보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휘하의 정부군은 사이고에게 자결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하고, 9월 24일까지 항복하지 않을 경우 총공격을 개시하겠다는 경고를 추가했다. 9월 24일 오전 4시, 3발의 신호포격을 시작으로 정부군은 총공격을 개시한다. 공격 2시간만에 시로야마의 방어진지는 모두 함락되고, 시로야마의 미야자키타니에 구축한 동굴에서 14명의 병력이 최후의 발도 돌격을 감행하여 분전하였으나 모두 사망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분전중 허리와 허벅지에 총상을 입자, 정좌하여 [[천황|덴노]]가 있는 동쪽으로 절을 한 다음 부하인 벳푸 신스케를 향해 가고시마 사투리로 "신돈, 신돈, 이쯤이면 됐지비(晋どん、晋どん、もう、ここらでよか)"하고 말한 뒤 [[할복]] 준비를 하고, [[카이샤쿠]]를 맡은 벳푸는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서해주시라요!(ごめんなったもんし)"'''하고 외치며 칼을 내리치고 자신도 곧바로 할복했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XO5SSshGYDw&t=450s|#]] 이렇게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 사쓰마 간부들은 전원 사망, 세이난 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